본문 바로가기
Travel/[2007.08 중국]

고구려 역사탐방을 다녀와서 [6일차] - 사진 스크롤의 압박조심.

by smolee 2007. 9. 16.
반응형

8월 10일.






드디어 이번 탐방의 마지막 날이다..

아쉽고 서운함을 달래기 위해 아침은 든든히 먹도록 한다.

이번 호텔의 식사 수준은 아주 좋은편이다.

탐방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호텔 조식은 주로 양식으로 해결하곤 했다.




왕씨 아저씨와 석별의 정(이라기엔 좀 이른)의 사진 한장을 찍고.
부디 안전운전하셔서 사고 없으시길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지나치면서 본 메가마트. 부산에 있던게 여기도 있다니...
메가마트가 그렇게 국제적인 회사였나 -_-a





이동하는 버스안에서 신선생님의 탐방 인터뷰 중.
역시 수정은 저런 상황에서도 보는이를 숙연하게 만드는 명연설을 하셨다.





현지를 인터뷰중이신 신선생님.









인터뷰 광경에 웃음이 나는 지영







인터뷰중인 준호







인터뷰중인 혜경









자칭 고양이 표정을 짓고 계시는 승연







백암산성 초입 마을에 있던 염소떼.
왠지 티벳 같은 고산지대에 있을법한 염소였다.








백암산성. 중국명 연주성산성의 입구.

백암산성은 고구려 천리장성의 일부로서, 평원왕때에 축조되었다. 성 이름의 백암은 이 부근이 석회석 지대이기 때문에 돌의 색깔이 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전략, 전술적인 요지로서 앞쪽으로 태자하가 흐른다. 태자하를 따라가게 되면 발해만이 나온다. 고구려의 옛 성중에 원형이 잘 보존된 성에 속하며, 치 견치석 점장대 등의 고구려 성만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멋진 포즈로 한컷








전체적인 성의 모양. 사람 키와 비교해봤을때 얼마나 거대한 성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아랫단은 경사를 주고, 그 위 부터는 수직에 가까운 경사로 쌓은 것을 볼 수 있다.
저기 튀어나온 부분을 치 라고 부른다.










치의 모습.







치의 모습. 역시 이런 세세한 부분도 둥글게 마감함으로써 아름다움을 추구하려고 하였던 흔적이 발견된다.










이쪽 성벽은 저렇게 외벽이 무너져 버려서 안쪽의 견치석방식의 내벽 구조를 잘 관찰할 수 있게 되어있다.










전체적인 백암산성의 모습. 주변 환경과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탐방중에 한번도 써먹지 못했던 플랜카드를 들고 한장









이곳은 성중에 위치한 가장 높은곳, 점장대이다.








점장대에서 바라본 성내부. 멀리 교수님이 보인다.








교수님 한컷









멀리 태자하를 배경으로 한컷.







내려가는길..








저기 보이는 밭이 바로 건물 터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성밑 마을 입구의 민가의 벽. 아마도 성에서 나온 돌로 세워진 벽이리라.








중국에서의 마지막 식사..









버스안에서의 교수님의 말씀도중.. 고구려의 멸망 과정에 대해 얘기해 주셨다.


국제적으로 분란시기였던 고구려 장수왕, 문자명왕 시기에 고구려는 급속히 성장하게 된다. 이때 중국은 수나라가 통일하게 되고, 동아시아는 크게 중국과 북방의 돌궐, 그리고 고구려의 3대 세력으로 나눠지게 된다. 통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수나라로서는 정치적, 경제적인 통일이 절실했을것이다. 따라서 세력의 결집을 위해 국제대전을 벌이게 되며, 이것이 바로 국제 대전의 필연성이다.(일찌기 역사를 살펴보아도, 중국대륙이 통일될때마다 외부로 그 힘을 방출하여 전쟁을 벌이곤 했던 기록이 나타나있다.)
 고구려도 물론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구려 내에서도 수나라에 대한 공격을 하자, 또는 방어를 해야한다는 논란이 일었다. 이러한 고구려 내부의 갈등을 반기는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신라와 백제이다. 신라와 백제는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에 대한 원정을 간청하는데, 이를 알아챈 고구려가 수나라를 선제공격하니 이때가 598년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공격 후 수나라 문제는 30만의 군사를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수문제의 아들 수양제가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게 된다. 수양제는 고구려 공략을 위한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나가는데, 그 중 하나가 대운하 건설이다. 대운하를 중국대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운하를 건설함으로써, 강남의 물류와 군사를 북방 고구려와의 전쟁에 집결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운하 건설과 더불어 주변국들을 하나하나 점령해 나감으로써 고구려를 포위해 나가게 된다.
 이윽고 수양제는 113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하게 된다. 특기할 것은 수나라 24로군 중에 11로군이 수군이었다는 것이다. 수양제가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요동성을 공격하였으며, 수군은 대동강에 상륙하였지만 전멸당하였고, 우중문 우중술의 30만 별동대는 살수에서 을지문덕에게 몰살당하게 된다. 결국 수양제는 패전하여 후퇴하였고, 그 후로 2번의 원정이 더 있었지만 실패하고 이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 수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여기서 이 전쟁이 국제 대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나라 및 수나라 주변의 국가들의 연합군과 고구려가 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수나라가 멸망후에, 당나라가 들어서게 된다. 당태종 이세민 또한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데, 당나라는 수와는 달리 30만 소수정예군을 동원하게 된다. 이 전쟁은 별개의 전쟁이 아니라, 수나라가 미처 이루지 못했던 고구려의 정벌을 잇는 계승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당나라의 장량(유명한 장수이다)이 이끄는 수군은 요동반도의 비사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요동반도 남쪽지역을 점령해나갔다.  또 당태종은 개모성을 점령하였으며, 신성을 공격하였고, 요동성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백암성은 성주의 항복으로 당나라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당태종은 안시성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안시성 성주 양만춘과 당태종과의 일화는 유명하니 생략하기로 하자. 당태종은 안시성에서 대패하게 된다. 이때 왜 장량의 수군이 구원하러 올라오지 못하였나 하는것에 대해서 교수님은 이런 결론을 내리신다. 고구려에도 수군이 있었기 때문에, 장량의 수군은 견제를 위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였다. 즉 고구려는 수군이 있었던 국가이다는 것이다.

 시간은 흘러 648년에 당나라 설만철이 박작성(지금의 호산장성)을 공격하게 된다. 수나라때 부터 계속하여 중국의 손길을 요청하던 백제와 신라중에, 김춘추가 직접 당나라에 가서 간청함으로써 당나라는 결국 신라를 선택하게 된다. 이때부터 신라는 친당정책을 고수하게 되며, 신라는 당의 원군에 힘입어 백제를 공격하게 된다.(얍삽한 놈들이다 -_-). 당나라 원군대장 소정방은 수군을 이끌고 금강에 상륙하게 되고, 나당연합군 13만명이 백제 사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그후 3년간 백제는 왜군등을 동원하여 백제 부흥운동을 벌인다.(여기서도 모든 종족이 포함된 직간접적인 국제대전임을 알 수 있다)
 660년말 나당연합군은 고구려를 공격하지만 실패하고 신라는 후퇴하게 된다.(여기서도 얍삽함이 느껴진다. 외부의 적을 끌여들여놓고, 자신들은 쏙 빠지는..) 
 668년 결국 평양성이 항복하게 되고, 671년 안시성이 항복하게 된다. 이로써 고구려는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아쉬운 역사이다. 역사엔 IF가 없다..는 유명한 말이 있긴 하지만, 만약에 저렇게 허무하게(그것도 같은 민족의 배신으로 - 물론 그시대엔 같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멸망하지만 않았었더라도 지금 2007년의 동아시아 형세는 전혀 틀려지지 않았을까? 정말로 아쉽고, 아쉽다.








집으로 가기위해 심양공항으로 향했다.








어디서나 삼성은 기치를 펄럭이고 있는것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심사장을 통과하는 팀원들










비행기 안에서, 중국돈 800위안을 펼쳐들고 -_-;
(기내 면세점은 중국돈 안받아준다는 말에 절망한 소원.)













인천에 도착해서 마지막 두컷.


난 혜경의 형부차에 얹혀서 집까지 잘 왔다는...ㅎㅎ




짧게나마 이번 탐방에 대한 소감을 적어본다.

먼저, 그 동안 나의 의식에 인위적인 한계를 두고 살아왔음을 느꼈다. 반도사관, 춘추사관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너무나 작은 스케일에 만족하고, 그게 당연한 것인것처럼 살아왔었다. 대륙의 거대한 스케일, 그 거대함에 충격을 받았음을 솔직하게 고백해야 겠다. 앞으로의 인생에 있어서 이 충격은 나의 발전을 위한 하나의 계기가 될 것이다.

둘째, 고구려라는 우리 민족의 고대 국가가 너무나 찬란하고, 화려하며, 웅장한 문화를 일궈왔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단순히 현장을 가보지 않고, 국사교과서의 활자와 빛바랜 사진으로만 바라보던 고구려가, 사실은 이렇게 크고 위대한 국가였다는 것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옛 속담이 그대로 맞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셋째, 이번 탐방을 계기로 많은 좋은 사람들을 알게되고, 멋진 추억들을 쌓을 수 있었다는 것도 큰 수확이라 할 수 있었다. 특히 과 특성상 서로 만나기 힘든 나의 경우에, 이번 탐방에서 정말 좋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다. 탐방 내내 즐겁고, 행복한 6일이었다.


앞으로, 적어도 1년에 한번 정도는 해외에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끝으로...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