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ravel/[2007.08 중국]

고구려 역사탐방을 다녀와서 [3일차] - 사진 스크롤의 압박조심.

by smolee 2007. 8. 13.
반응형

어제 저녁에 잠시 모여서 교수님의 고구려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동북공정은 동북에 있는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의 일명 동북3성이라 불리는 만주지역에 대한 역사프로젝트이다.
역사 왜곡의 전례를 살펴보자면 근래에는 일본의 1981년 역사교과서 왜곡이 가장 유명하다.
역사라는 것이 한번 왜곡되어지면 그 당시에는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비판과 질책이 많지만, 시간이 감에 따라 세대가 바뀌면 그 왜곡된 역사를 정사(正史)로 배우고 알게되는 현상이 무서운 것이다.

동북공정을 실시한 이유는 여러가지로 추측이 가능한데,


1. 신 중화 제국주의의 기틀을 잡아서 선진국의 부상을 노리는 것이다.

중국은 일찌기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중국은 통일된 시기보다 여러 나라로 분열된 시기가 길고, 시대마다 주요국가를 성립한 민족도 한족이 아닌 외국 세력이 많았다. 현재 56개 소수민족중에서도 과거에는 그렇게 대국가를 이루고 한족을 지배했던 민족들이 섞여있는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소수민족들의 통합'의 필요성이 대두되게 된다. 이를 위해서 역사의 조작 및 왜곡을 통해 모든 소수민족들을 중화민족의 테두리에 넣으려는 사전 공작의 일환이 바로 동북공정의 측면중 하나로 볼 수 있는것이다.

최근 FTA가 이뤄지고 세계화가 피할 수 없는 선택이 되어가는 가운데, 세계는 EU, NAFTA 등의 지역 단일화를 거쳐 전세계의 단일 시장화가 가속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현재는 미국과 유럽이 전 세계 패권을 다투는 형상이 되고 있는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종교가 기독교이며 인종적으로도 흰 피부의 사람들이다. 과거에 지금과 같은 기독교, 흰피부의 세력이 득세했을때,  내셔널리즘이 유행하여 서부인들의 전세계의 점령이 이루어진 역사가 있다. 이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대항세력이 있어야 하고, 그 세력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동아시아라는 것이다. 동아시아지역의 맹주였던 일본은 최근 많이 힘을 상실한 상태이고, 중국이 혁명의 성공으로 매우 빠르게 부상하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으로서는 지금이 선진국으로의 부상기회이며 절대 잃어서는 안되는 기회인 것이다.(참고로 교수님께서 우리나라는 이미 실기(失機)했다고 하셨다. 기회를 잃었다는 말이다.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기회는 바로 전두환 - 노태우 시기라고 하신다)


2. 동북공정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여러 공정중의 일환이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중국이 성장함에 따라 그 확대 방향으로 여러 문제와 국제 분쟁이 생기게 된다. 중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서남공정, 서북공정 등의 여러 공정을 실행하고 있다. 또한 남쪽으로는 동남아시아를 중국 질서화 하기 위해서 운남성 근처 태국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있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조어도 문제는 중국의 석유수송로가 조어도 쪽을 지나기 때문에, 만약의 경우 미국과 일본의 함대가 그 루트를 봉쇄할 가능성이 대두됨에 따라 촉발된 문제이다. 이를 해결하기위해 중국은 태국쪽으로 운하를 파서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3. 재중동포를 중화민족 속으로 흡수함으로써 만주를 중국의 역사화 하는것이다.

만주지역(동북3성지역)은 중국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지리적으로 세계의 슈퍼파워들이 교차하는 곳으로 문제 발생의 소지가 다분하다. 따라서 명분적으로, 고대로부터 중국의 지역이라는 역사적인 명분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재중동포, 즉 조선족을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로 인식화 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가 조선족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그 중국의 계략에 빠져드는 것이다. 조선족이 아닌 '재중동포'라는 단어를 써야하겠다.

 또한 실질적으로 영토의 분쟁을 막기위해 중국은 어쩔 수 없이 동북공정을 추진할 수 밖에 없다. 간도와 연해주는 그 대표적인 영토분쟁 우려지역으로, 간도는 조선시대까지 조선의 영토였으나 간도협약에 의해 소유권이 바뀐 곳이며, 연해주는 중국의 영토였으나 러시아에 강탈당한 곳이다. 중국으로서는 반드시 수복해야할 영토이며, 중국의 동해진출을 위해, 그리고 러시아 미국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요지로써의 가치가 큰 지역이다.

 최근 재중동포가 모여살던 조선족 자치주가 인구의 감소로 인해 해체되었다고 한다. 재중동포들이 좀더 나은 삶을 찾아 남으로 이주하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어떻게 보면 좋은 현상이지만, 이들이 지금껏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음으로 해서 '경제적 영토'를 형성할 수 있었다는것을 생각해보면 우려할 만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이들 재중동포를 대상으로 3관교육을 실시하고 있다고 하는데, 3관이란 애국관 민족관 조국관의 줄임말으로 중국중심의 애국관과 조국관, 그리고 중화민족의 민족관을 교육시켜 재중동포 세대 자체를 정신적으로 개조 시키려는 시도라고 한다.
역사가 무서운 것이, 바로 이렇게 교육을 받은 세대가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옳다고 여겨 버린다는 것이다.


4.  북한의 만약의 사태에 미리 대비하는 차원의 전략이다.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을 중국측에서는 중국내부의 소국병합을 위한 국내의 통일 전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을 그들의 주장대로 해석해버리면 고구려의 역사는 한낱 중국의 일개 지방정권정도로 추락해버리고 만다. 고구려는 사료에 근거하여 약 900년 동안 중국본토에 수십개의 국가가 명멸하는 와중에서도 꿋꿋이 버텨왔으며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또한 수,당시기에는 중국에 맞서서 위구르등의 기타 북방민족들과 연합하여 싸워왔다. 이는 명백한 국제대전이며, 결코 국내 통일 전쟁이라고 할 수 없는것이다. 역사에서의 이러한 '명분'은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써, 이런 거짓된 명분이 문서로 남겨지게 된다면 먼 훗날 역사가는 이러한 거짓 명분을 사료로 삼아 역사를 유리하게 해석하게 되는것이며, 일찌기 고려의 서희는 이를 간파하고 외교담판에서 적을 상대로 통쾌하게 논박했던 것이다.
(여기서 역사학이란 좀 쪼잔하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_-)

 말을 줄여서, 만약에 북한에 유고가 발생한다면 중국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교수님께서 중국의 지인에게 들었던 얘기를 옮겨보자. 그에 따르자면 북한에 유고가 발생하면 북한내부에 친중정권이 세워지게 되고, 이 정권은 중국과 군사연방화를 추진하게 되며, 최후로는 북한을 중국의 영토로 포함하게 된다는 시나리오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 남한의 군사력은 절대 북한과의 대결을 위한 군사력이 아니라고 한다. 남한의 군사력은 중국,일본을 대비하는 군사력이며, 특히 이를 위해 해군력의 증강이 급하다는것이 교수님의 생각이셨다. 현재 동북아의 군사상황은 우려할 만한 수준인데, 그 증거로는
-각국의 군사비 지출이 증강되고 있다.
-외국산 무기의 수입 1위국가는 중국이다.
라는 것을 들 수가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이지스함의 건조 등 이러한 군사적 움직임이 눈에 띄게 활발해지고 있다.

교수님께서는 앞에서 우리민족은 이미 기회를 놓쳐버렸다고 말씀하신바 있다. 그러면 이렇게 마냥 뒤떨어진채 있어야 하는것인가? 그렇지는 않을것이다. 교수님은 '세계의 중요한 파도가 다가오는 시기에는 그 파도를 타지 못하면 가라앉게 된다'는 말로 정리해주셨다. 이러한 격변속에서는 그 변화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기회는 놓쳤으니 그 격차를 줄일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면 사방이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기회를 찾아낼 수 있을것인가?

 이를 위해 교수님은 해륙사관을 역설하셨다. 해륙사관이란, 쉽게말해서 대륙 중심으로 보지말고 바라와 육지를 겸해서 넓게 바라보자는 것이다. 한반도를 대륙에 붙은 조그만 땅덩이로 보던 시각을 버리고, 넓은 대륙이 한반도를 통해 바닷길로 통한다고 생각을 하자는 것이다. 이탈리아 반도와 지중해를
연상해보면 금방 알 수 있을것이다. 우리의 서해, 남해, 동해가 곧 동아지중해가 되는것이다. 이러한 동아지중해에서 우리나라만의 역활을 찾자는것이 바로 윤교수님의 해륙사관이요, 역활론인것이다. 과거 장보고라던지, 또는 극성기의 고구려는 이러한 해륙사관적인 시각 아래에서 성공을 한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잠깐 고구려에 대해 얘기를 해보겠다. 고구려는 특별한 지정학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그 특징이 고구려를 문화대국화하는 요인이 되었다. 고구려의 북쪽으로는 시베리아 삼림지대가 있어 삼림문화가 전파되었으며 서북쪽으로는 넓은 초원이 펼쳐진 초원문화가 있었고, 그리고 서남쪽으로는 지평선이 펼쳐져 있었다. 또한 실크로드를 통해(벽화를 보면 씨름을 하는 서역인이 나온다) 서역문화도 전파되어 왔다. 고구려는 이러한 여러가지 수많은 인종, 수많은 문화의 집산, 센터역활을 하였으며 이러한 문화가 고구려 내에서 융화되어 반도를 거쳐 백제, 신라, 남중국, 일본 등으로 전파되어 나갔던 것이다. 일종의 문화의 용광로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교수님은 이를 '문화의 핵(Core)'의 역활을 했다고 표현하셨다.
 
이러한 해륙사관적인 문화센터의 모델을 당시 광개토태황이 모델을 성립시켰으며, 이후 아들인 장수왕이 완성시킴으로써 고구려의 찬란한 전성기가 도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장수왕때 고구려가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긴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왜 고구려는 수도를 남진했을까?'라는 의문이 들때가 있을 것이다. 북방으로, 서쪽으로 거대한 영토를 얻었는데 왜 수도를 한반도 남쪽으로 옮겼을까? 지도를 보면 국내성을 중심으로 당시 한반도의 고구려 영토는 이러한 동아지중해의 Core의 역활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하여 1)중국의 남북조와 동시 등거리 외교를 펼쳤으며 2)백제, 가야, 신라의 해상 외교를 차단했으며 3)일본, 제주와 무역을 하였던 것이다.

 실질적으로도 사례를 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국지의 오왕 손권에게 말 800필을 판매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니 당시 고구려는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를 톡톡히 이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중계무역으로 경제력이 상승하고, 또한 문화의 집산으로 문화특구가 된 고구려는 일개 국가가 아닌 제국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8월 7일 제 3일차

이제 여정도 벌써 반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남은 날이 멀기만한 느낌이다.

출발하기전 옷걸이 소동이 있었다 ㅎㅎ
쪼잔한 중국...










이제는 이렇게 심심하면 서로를 찍고 놀곤 했다 -_-;(혐오사진 죄송죄송(__))









 드디어 도착한 세계문화유산 광개토태황릉비.
 과거 묻혀있던것을 파냈는데, 도대체 무슨비인지 모르다가 일본이 만주를 점령했을때 일본학자들이 비로소 광개토태황비라는것을 알아냈다고 하는 사연이 있다. 당시에 일본학자들이 일본측에 유리하도록 석회를 이용, 비문을 조작했다는 설이 분분하다.(X-ray 촬영을 통한 조사같은것도 했었다고 한 6년전 역사스페셜에 나온거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

 원래는 노출되어 있다가 지금은 답답하게 보이는 유리창 안에 보호되고 있다. 총 1775자가 새겨져 있으며 동양최대의 금석비문이다. 장수왕때 건립된 것이다.









 내부가 좁고, 또 중국인 관리자가 사진촬영을 금하는 터라 눈치를 살살 보면서 한장 찍었다. 교수님의 명언이 있었기에 가능했던일. '하지 말라고 해도 눈치껏 해라' 처음에는 몰랐지만 교수님은 정말 멋진 분이셨다 -_-)b

 가까이서 본 비는 자연석을 전혀 다듬지 않고 그 글자도 대충 쓴듯한 느낌이지만 웅장한 기운이 있다.흡사 어린아이가 그림을 그린듯한 천진난만함이 서려있다. 비문은 전체적으로 손상이 있는 편이다.
 
 내용상 크게 3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앞부분은 고구려의 역사를 요약해놓았고, 중간부분은 광개토태황의 업적을 칭송한 부분이며 뒷부분은 무덤의 관리를 명한 것이라 한다. 당시 광개토태황릉은 전쟁 포로들을 시켜 지키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예쁘게 다듬어진 돌을 이용하지 않고 자연석을 사용한 것일까? 기술이 부족해서는 아닐것이다. 이는 뒤에 나올 장군총을 보면 알 수 있다. 교수님의 견해는 이렇다. 고구려가 태황무렵 갑자기 강력해지고 영토가 팽창됨에 따라 여러문화와 이종족들이 유입되게 된다. 이러한 다종족적 국가, 다문화 국가를 융합하여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종족간의 알력이나 문화의 충돌은 피할수 없는 것일 것이다. 이 태황릉비의 무형질성, 자연스러움은 이러한 여러 충돌을 최대한 줄여보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실제로 나중에 청태종 황태극의 무덤에도 가보지만, 그 무덤의 거대하고 정교한 사각비 앞에 섰을때의 느낌은 사람을 압박하고 누르는 느낌이라 태황릉비의 자연스럽고도 친근한 느낌과는 많이 달랐다.
 
 이 비문에서의 핵심은 '고구려인은 확실한 자아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흔히 우리가 백의민족, 배달의 자손, 단군의 자손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역사성은 희박한 편이다. 특히 내가 개인적으로 만나보았던 몇몇 재중동포/중국인의 중화사상을 볼 때, 걱정스러울 정도로 한국인은 역사의식이 없다. 아마도 이러한 '고루한'얘기는 극단적 민족주의나 보수주의 정도로 몰리는 세태가 그 원인이리라. 그러나 이러한 근본의식 없이는 그 민족, 국가의 발전에 한계가 있기 마련인것은 찬찬히 생각만 해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이러한 민족주의, 역사의식이 미처 성숙하기도 전에 너무나 일찍이 서양적인 사고에 익숙해져 버린것은 아닐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가 확실한 역사의식, 자아의식을 가졌다는 사실은 이 비문에 여실히 들어난다.
'我易皇天之子母河伯女'(나는 황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라)
'北夫餘天帝之子母河伯女'(북부여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라)
 당시 고대국가 사회에서 황천, 천제라는 단어는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었다. 명분이 중요한 시대였기 때문에(명분하나 가지고 서로 전쟁도 불사한다 -_-) 이러한 황천, 천제라는 문구를 쓸 수 있다는 것은  북부여가 대단히 큰 규모의 국가 또는 제국이었다는 것을 은연중에 말해주고 있으며 또한 그에 따른 고구려인의 뿌리에 대한 자긍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모두루묘지에서도
'河伯之孫 日月之子'(하백의 자손이며 해와 달의 자손이다) 라고 하여 천손사상이 깊이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해와 달의 자손, 천제(하늘의 제왕)이라는 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_-; 그렇게 되면 거의 '믿거나 말거나'식의 미스테리 이야기가 되어버려서...(물론 나는 그런 얘기를 엄청 좋아해서, 혹시나 주몽은 정말 과거에 외계에서 찾아온 우주인의 후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는데 차마 교수님께 여쭤보진 못했다..) 여기서 일월은 일 = 해 = 해모수를 상징하며 월 = 달 = 유화부인을 상징하는 해석이 가능하다고 하셨다. 이 해와 달 사상은 자주 등장하며, 나중에 오회묘고분벽화에서도 등장하게 된다.

 비문의 내용을 보게되면 여러가지 역사적 정황을 알 수 있는데, 우선 고구려에도 수군이 존재했다는것이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바다를 격하고 있으며 영토도 넓은 대국에 수군이 없을리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앞서 말한것처럼 역사는 참 쪼잔한 것이라 무엇이라도 증거가 없다면 한낱 허황된 주장으로 치부하고 마는 경향이 있다. 이 비문에서 말하기를 '수군을 거느려서 아리수를 건너 백제를 점령하고'라고 함으로써 고구려에도 수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정묘년 조항이 있는데, 이는 일본측에서는 '일본이 한반도로 건너왔다(일본이 한반도를 점령했다)'라고 해석하고, 한국측에서는 '고구려가 일본으로 건너갔다(즉 고구려가 일본을 점령했다)'라고 해석함으로써 논쟁중인 부분이다. 일본은 이부분을 인용해 임나일본부설, 즉 한반도에 일본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다스렸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이런 설명을 들을때마다, '아니 이런 큰 비를 새길려면 오해않게 글을 잘 써서 좀 깊게 파던가 -_-; 하는 생각을 종종 하였다.)

 그리고 병자년(400년)의 기록을 보면,
 '399년 왕이 평양으로 가는데, 신라의 태자가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왕이 5만의 병력으로 신라, 부산, 가야의 왜를 쳤다'는 기록이 있다. 즉 당시에 왜,가야,백제의 연합군과 고구려의 대결 구도였음을 보여준다. (신라는 이렇게 도움을 받아놓고 나중에 뒤통수를 친다 -_-.. 신라가 통일하지 않고 고구려가 통일했으면 하고 얘기하던 분들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 대목.)

 사실 광개토태황이 즉위하던 때의 고구려는 상당한 위기상황이었다. 당시로서 백제가 강대국이었는데, 18세에 태황이 즉위하자마자 점령을 시작했다니 정말 고구려로서는 영웅이나 다름없는 인물인 것이다.(당시 광개토태황보다 10살가까이 많은 나는 고개가 숙여지는 부분-_-;; 난 뭘 했을까..)

 광개토태황은 39세에 돌아가시는데, 비문에서 광개토태황이라고 칭함에도 불구하고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광개토 왕으로 폄하해버리고 만다. 왜 그랬을까? 사대주의? 아니면 실제로 이 비를 보지 못한것일까? 어쩌면 그 자신도 불충분한 사료와 사관의 희생자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태황의 정복활동은 단순한 영토확장이 아닌 질서의 재편이라는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당시 고구려의 영토는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초원, 삼림들이라 직접통치가 불가능한 지역들이었다. 즉 토지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광개토의 土는 질서의 확장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문화의 인터체인지 역활을 하며 동아시아문화의 집적, 파급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이를 교수님은 Heart론으로 명명하셨다고 한다.












정면에서 다시 한장. 당시에 일본인인듯한 사람이 고가의 카메라 장비와 사다리를 가지고 정성껏 찍고 있었다. 팜플렛 또는 책자용 사진을 찍던듯?








광개토태황릉으로 가는 길. 너무나 더운 날씨였다.







이곳이 바로 광개토태황릉. 돌무더기 같지만 사실 겉에 다듬어진 돌로 쌓여있던것이 하나둘 벗겨짐으로 해서 이렇게 되어버린것이다. 총 9층으로 되어있다.

이 곳에서 전돌이 발견되었는데, 전돌의 내용은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태왕릉이 산과같이 안전하며 산과같이 견고하길 바랍니다)로써, 이를 근거로 이 무덤을 태황릉으로 간주하고 있다. 고구려 역대 태왕이라는 칭호를 얻은 사람은 광개토태황뿐이기 때문이다.










릉 뒤쪽에 있는 제단. 과거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추정된다. 한 가지 의문은, 왜 입구와 반대쪽에 제단이 있었던 것일까 하는 것이다. 이는 장군총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저 큰돌을 정호석이라고 한다. 공학적으로 볼때 무게를 분산 수용함으로써 무너져내림을 방지하며, 의미적으로 볼때 고대 조선지역의 선돌문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한 면에 5개씩 있으며, 많은 수가 분실된 상태이다.









멀리서 본 장군총. 왠지 잉카 마야 지역의 분위기가 풍긴다고 생각하는건 나뿐일까?









태황릉 현실로 올라가는 계단위에서.







현실앞에서 누님의 한컷.
역시 여기도 중국인 관리자가 사진을 못찍게 지키고 있다.








들어가는길, 입구가 상당히 좁다.









결국 현실 사진은 찍지 못하고.. 눈을 돌려 능선을 한 장 찍었다. 보면 알겠지만 여기저기 울룩불룩한 것들이 보이는데, 저게 다 고분들이다. 이 곳에만 12000여기의 고분이 있다고 하니... 중국판 '왕들의 계곡'이다.









태황릉 앞의 조그만 전시관에서.
탁본 뜬 것이 있으면 구매하고 싶었으나 없어서 포기하고, 대신 교수님이 추천하시는(무지 싼거야!)
태황릉비 모형을 구입했다. 가격이 40원이었던가....(그런데 돌로 만들었다고 해놓고 자세히 보니 플라스틱 주형...-_- 대놓고 사기치는 그 용기란...)









여기가 바로 장군총. 동양의 금자탑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답다. 7층으로 되어 있으며 각면은 3개의 정호석으로 받쳐져 있다(그중 1개는 유실). 고구려 고분 중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이 무덤을 장수왕의 무덤이라고 보지만, 교수님은 이 무덤을 고구려 시조 주몽의 릉으로 보시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음
-다른 릉에 비해 손상이 거의 없음 -> 어떤 신격화된 신앙이 없으면 불가능함.
-용산이라 불리는 산이 뒤에 있음(태황릉비에서 주몽의 묘는 용산에 있다고 말함)
-붉은 기와벽돌이 발견(고구려에서 궁전/사찰/관청에만 쓰인 벽돌)
-주변에 딸린 무덤이 있음(아마도 주몽의 3신하의 무덤이 아니었을까)
-장수왕은 평양천도후 오랜세월이 지나 돌아가셨는데 그의 무덤을 평양이 아닌 집안에 설치하는것은 말이 되지 않음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고, 그에따라 릉 앞에는 잔디로 유네스코 마크가 새겨져 있는데,
좀 조화가 맞지 않는 느낌...









옆에 있는 목재 난간을 통해 올라갈 수 있다. 정호석의 크기가 사람 대비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냥 쌓은게 아니라 저렇게 아랫돌을 깎아 내어 틈에 맞추어 쌓았다. 이렇게 되면 하중으로 아랫돌이 깨어지면서 윗돌이 쓸려내려갈 염려가 없다. 이를 그리드 공법이라 한다.











또한 그냥 평평한 돌위에 평평한 돌을 쌓는다면 쉽게 밀려나가는데, 저렇게 쐐기돌을 박아넣어 한층 안정적인 구조를 만들었다.








여기 관리원은 조금 게으른 편이어서 몰래몰래 3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내부 벽화는 없으며 관을 올려놓았던 관대가 있다. 그 위에 돈은 왜 던져놓았는지 -_-;;(어딜가나 돈던지는 문화는 여전하다)

자세히 벽을 보면 마야문화에서 나타나는 돌을 깎아서 ㄱ 모양으로 맞춰 쌓는 공법도 보인다.









딸린 무덤의 전경. 부인 또는 첩, 장수의 무덤 등등 여러가지 설이 있다.








장군총 제일 윗단의 돌이다. 자세히 보면 동그란 구멍이 여러개 나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로 기둥을 세운 자리이다. 이를 통해 무덤 위에 목조 건축물이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사당이라고 할까?










여기도 마찬가지로 입구 반대쪽에 제단이 있다.








모서리 부분을 한컷.









정호석이 유실된 부분이다. 조금씩 밀려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중국정부는 어디서 돌좀 구해서 세워놓던가 하지 -_-;)








딸린 무덤에서 한장씩.






오늘의 하일라이트. 중국 대사 및 유명인들을 다 만나 보았다는 자칭 한국인이라는 저 아저씨. 저 아래 광개토태황릉 앞에서 한글 현수막을 걸어놓고 장사를 하다가 무슨 트러블이 있었는지 장군총까지 따라와서 가이드랑 시비가 붙었다. 욕설을 하고 난리를 치다가 버스앞에 서서 출발을 저지하는 등...
결국에는 화해하고 태황릉까지 타고가야겠다며 버스에 당당히 오르신 저분.

중국사람들 앞에서 참 부끄러웠다. 결코 한국인은 아닐테고 재중동포 같던데....
현지 가이드님도 참 중국사람 보기에 부끄러운 일이라고 투덜투덜..









오회분 4호묘와 5호묘가는길. 고구려의 벽화는 3단계를 거쳐 발전하는 모습을 보인다.

1.생활 : 각저총, 무용총 등에서 나타나며, 사람들이 등장하여 일상생활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2.약간의 추상화 : 오회분 4,5호묘에서 나타나며 사신도 등이 등장한다.
3.극도의 추상화 : 강서대묘, 안악3호 등에서 나타나며, 형이상학적인 그림으로 가득 차있다.

초기의 벽화는, 흙벽에 회반죽을 칠하고 그 반죽이 마르기전에 급히 그려야 했던터라 그림이 작고 정교하지 않았다. 이를 프레스코기법이라 한다. 그러나 후기에 와서 석벽에 접착제와 안료(광물질 물감)를 써서 직접 그리게 됨으로써, 그림의 크기가 크고 정교하고 화려하게 되며 거의 훼손되지 않은채로 전해지게 된다.











내부는 이렇게 긴 통로로 이어져 있으며, 매우매우 시원했다(정말 거기서 살고 싶을 정도로)
윗부분은 아마도 후대에 보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찍으면 안되는 곳이었지만, 어차피 플래시만 터트리지 않으면 벽화의 손상은 염려가 없으니 조심조심
바닥에 쪼그려 앉아 찰칵. 조용한 현실에 유난히 큰 셔터소리가 울리자 여 관리자가 다가왔으나 이미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이럴때면 소리안나는 컴팩트 디카가 부럽다.

천장이 모줄임 양식으로 되어있음을 볼 수 있으며 모든 벽면에 용의 형상이 그려져 있다. 천장의 큰 용은 아마도 왕(황제)을 뜻하는 것 같으며 주변의 수십마리 작은 용들은 고구려의 국민이나, 혹은 다른 이민족들을 표현한 것 같다. 동,서,남,북 사방에 수호신인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그려져 있으며 최 상단 벽면에는 일월의 신 및 각종 고구려의 신들이 그려져 있어 신비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다만 아쉬운것은 환기가 되지 않고 많은 관광객들이 출입함에 따라 호흡하는 CO2에 의한 이슬 서림 현상으로 인해 손상이 가속화 되는것 같았으며, 마음만 먹으면 만져볼 수 있는 환경이라 추가적인 손상이 염려되었다는 것이다.(실제 경주 석굴암도 잘못된 개축으로 인해 물방울 서림현상의 손상을 겪고 있는것으로 알고 있다)

이 곳에 과거 거지들이 살았었다고 하니... 이정도라도 벽화가 남아있는게 다행인듯 하다. 아마도 그들또한 이러한 벽화에 선뜻 손을 대지 못할 위압감을 느꼈으리라.. 그러나 박혀있던 보석들은 다 없어졌다고 한다(무협지에 나오는 야명주 -_-;)












릉 앞쪽 전시관에서 각 고분들의 벽화를 전시해놓았다. 마지막에서 두번째 그림은 바로 해와 달의 신이다.






릉 앞에 있던 기념품 판매점. 마셔보라고 차 한잔씩을 줬는데 차가 달콤하다. 꿀을 넣었다고 한다.

뒤에 보이는 저 비석 모형은 역시 공산품이었어 -_-; 수제는 무슨..







압록강 국경비를 앞두고 식사를 하였다. 메뉴는 불고기. 소불고기인듯 한데 무척이나 맛이 좋았다.
거기다가 반찬들도 거의 제대로 한국맛이 났고... 고기는 굽기 바쁘게 사라지곤 했다.
그런데 웃기게 사이다 포장지에 세븐이 모델로 나와있던..-_-;(중국 사람들은 취향이 특이한가보다)









자 오늘 여행의 하일라이트(는 앞에 아저씨였고-_-)

이제 앞에서 배운 중국어를 써먹을 순간이 왔다.
하도 조x군이 눈치를 주길래, 내가 총대를 메고,

'워먼 샹 니 헌 퍄오량. 포토 플리즈 -_-;'

눈 딱 감고 한것인데, 의외로 무지 좋아한다 -_-;;;
역시 한류.... 대한민국의 위상을 느꼈다(쿨럭;)

네네 그래서 이렇게 한장....뻣뻣...
본인의 손은 닿을락 말락 위치를 못찾고....










일단 총대를 메니까 줄줄이 찍겠다고 야단이다 -_-
우리의 조장 류군.. 과감하게 브이를 그리고...

참고로 저 앞치마에 있는 브랜드가 이 동네에서 젤 유명한 맥주브랜드다.
누군가 휴대폰 SHOW 광고랑 비슷하다고....








충격....
가만히 사진 찍던 쟤가, 조군이랑 찍을때 웃으면서 V를 그렸다....
그후로 우리는 조군을 왕따시키게 된다 -_-;









신선생님 사모님이 절대 봐선 안되는 사진!
탐방기간 도중 느꼈지만 신선생님의 마음은 아직도 20세셨다 ㅎㅎ







가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압록강.
압록강이라고 하니, 정말로 느낌이 그렇다..
저기 건너편은 북한이다.







지혜도 한장.







교수님이 항상 강조하시던 얘기가 있었다. '자신이 직접 보고서 말해야 한다'라고.
압록강은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서 거대한 강의 이미지였다. 황하처럼.
그러나 결코 압록강은 그런 국경의 강이 아니었다.
실제로 본 압록강은 너무나 좁았으며, 강을 사이로 양쪽 문화가 바뀔 정도의 거대한 강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는 전국전도에 그려진 경계선으로의 압록강의 이미지에 속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건너편 북한 전경. 산을 개간을 한것인지, 산에 밭이 많은거 같은 느낌이다. 돌아다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신선생님 한장







여기가 아까 그 불고기집. 베컴이 인상적이다.






또 한참을 버스로 달린다. 환도산성을 보기 위해서이다.
중국의 여행이라는 것은, 여행지와 여행지 사이 거리가 버스로 기본 2시간이다. 이번여행에서 가장 길었을때는 5시간.... 이쯤되면 진이 탁 빠지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애써 기력을 차린다.


환도산성이란?

집안의 국내성 옆 환도산에 위치한 산성이다. 국내성이 도성이라면 환도산성은 위급시에 대피하여 방어할 수 있는 곳으로, 조선시대 한성과 남한산성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산의 형세를 그대로 살려 지은 성으로 난공불락이었다. 고구려 역사상 3번 임시수도의 역활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산이 둘러싸고 있는 중으로 넓은 평지가 존재한다. 또한 식수원이 되는 물도 풍부하게 흘러나온다.








남문의 전경. 전형적 고구려 육합식쌓기 모습이 보인다. 앞쪽의 구멍은 물이 내려가는 하수도(수구문)이다.









전경 한컷. 아마도 높이가 꽤 높았을것이다.








자연적형세를 이용하여 적을 둘러쌀 수 있는 옹성구조로 되어있다.










안쪽에서 본 성벽






고구려 성의 특징인 점장대가 여기도 존재한다. 일설에 따르면 연개소문의 누이동생이 이곳에서 지휘를 했다고 한다. 기능적일 뿐 아니라, 굽돌이양식(각을 둥글게 처리하는 기법)을 통해 미적인 아름다움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각자 한컷씩 찍고..








저렇게 시원한 계곡이 흘러내려 물장난도 쳤다. 주변에 싱싱한 오이를 팔길래 사서 먹기도 하고..

참고로 중국은 과일이 무척 많이 생산된다. 종류도 많으며 가격도 싸다. 약 2~3원정도면(한화 3~400원) 한바구니를 사서 먹을수 있는데, 그 맛이 또한 일품이고 싱싱하다. 우리가 중국산 농산품 안좋다고 말하는 것은, 수출시에 약품을 많이 뿌려서 그런 오해가 생긴것이라 한다. 아무튼 싸고 맛있다는것은 확실하다.












저 곳은 바로 국내성의 성벽터이다. 과거에 언덕인줄 알았으나 발견 후 복원되었다고 한다. 전형적 고구려의 육합쌓기가 보인다. 앞에는 해자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공격/방어를 위해 부분부분 튀어나와 있는 시설인 '치'가 존재한다.











압록강을 따라 달리며.... 건너편은 북한이다.
이렇게 보면 볼 수록, 압록강은 큰 강이라던 종래의 생각에 속았다는 느낌만 자꾸 든다.








도중 생수 구입을 위해 들른 가게에서 쉬고 계시는 교수님.







여긴 어떤 식당이었는지 벌써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략적으로 저정도면 맛있는 축에 속했다.
무엇보다 탕수육이 나왔으니 ^^








중국의 종업원들은 저렇게 일이 없으면 모여서 떠들고 논다. 한국 같았으면 택도 없는 일인데...
이번 탐방때 돌아본 중국 지역의 대부분 종업원이 저런 모습을 보였다. (단, 모란봉은 제외)







버스안에서 재미를 위해 퀴즈대회를 벌였다. 상금은 200위안. 우승팀의 대표 수정이가 교수님으로 부터 상금을 수여받고 있다.

그런데 이때부터 나의 18-70mm 번들렌즈가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다. 켜고 끌때 극심한 소음이 발생하여 주변의 시선을 끌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이때부터 카메라 전원은 되도록 끄지 않게 된다....









오늘 숙박할곳은 4성급 호텔이다. 로비부터 심상치 않았다.







벌써부터 숙녀분들은 시끌시끌. 4성급 호텔에 흥분하고 있다
살짝 들었지만 '이제 맘놓고 일 볼수 있을거 같다'던.....-_-;;







이정도면 강남 모텔급 그 이상이다.(결코 가봤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런 호화스럽고 세련된....
무려 SBS, KBS가 나온다!










창밖 야경도 볼만하다






옷장엔 샤워 가운이 있었는데... 남자끼리라서 별로 입을 기회가 없어 유감이었다.


여담이지만 TC님이 방마다 들러서 '이정도면 뭐 보통이죠. 걍 잘만은 하네' 하던 기억이 난다.
TC님은 상당한 명품족스런 취향이 있으신것을 눈치챘다.









역시 오늘 저녁도 맥주로... 피곤했지만 서로 많은 얘기를 나누는 것이 그렇게 재미가 있었다.
참고로 오늘의 맥주는 압록강맥주.


이렇게 하루가 또 지나간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