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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ression-단문들

버스에서

by smolee 2008.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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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었던 방학이 끝나고 처음으로 수업을 들은 후, 언제나처럼 쪽문을 지나 역으로 향했습니다. 쪽문, 굳이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후문이 아닌 이문으로 4년을 다닌 이유는 쉽게 알 수 없네요. 그저 내가 속한 공대건물을 가기에 좀 더 편리하다는 것만으론 경사가 심한 길로 다니는 것을 설명할 수가 없는데.. 이 길을 따라 내려가고, 올라오다 보면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합니다. 그 대부분은 구분하기도 쉽지않은 언젯적의 기억들이지요. 간간히 섞여 다가오는 얼굴들은 이미 학교를 떠난 친구들이거나, 한 두번정도 얼굴을 마주친 사람들입니다.

언제나 버스를 기다리던 그 곳에서 버스를 기다립니다. 배차간격이 꽤나 길어서 그동안 나는 길가에 있는 동물샵 유리창 너머의 강아지와 고양이를 바라보는 것을 일과로 삼았지요. 사람들이 그렇듯이, 동물들도 시간이 갈수록 낯선 얼굴로 바뀌어 갑니다. 다들 어디로 가는 걸까요..

버스가 옵니다. 초록색 버스, 사람들은 다들 저마다 서둘러 앞줄에 서려 노력합니다. 나는 손에 교통카드를 꼭 쥐고 천천히 여유롭게 걸음을 옮깁니다. 나의 자리는 정해져 있지 않아요. 버스가 한산하면 나의 자리가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없는 것이지요. 나는 번잡한게 싫다고 말하지만 실은 경쟁하고 부대끼는데 재주가 없는 것이라는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게 혹자는 '그건 Looser적인 생각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자리가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좌석 창가에 앉아 가방을 무릎에 놓습니다. 빈 옆자리에 가방을 두지 않는것은 꽤 오래된 습관입니다. 왜 그런지는 나자신도 잘 모릅니다. 아마도 누군가가 탔을 때, 가방을 들어올려 '이 자리가 비었습니다'라는 나의 뜻이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서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글쎄요..

버스가 정차하고, 사람들이 올라옵니다. 맨 앞에 올라 탄 미니스커트의 아가씨가 제 옆의 빈자리를 발견하고는 잠시 주위를 더 둘러봅니다. 저기에 앉을까 말까 하는 고민을 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다가 결심한듯이 다가와 엉덩이를 살짝 의자에 걸쳐놓고 핸드백을 무릎에 올려놓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약간 긴장을 하기 시작합니다. 여자가 옆에 앉으면 긴장하는 것 역시 나의 잘 고쳐지지 않는 습관입니다. 다리를 좀더 여자에게서 멀리, 몸을 되도록 창쪽으로 비켜줍니다. 그리고는 이어폰을 꺼내어 귀에 꽂습니다.

이미 나의 시선의 자유는 빼앗긴 지 오래입니다. 나는 여자쪽으로, 그러니까 나의 시각의 절반의 자유를 잃은 셈입니다. 누가 강탈하지도 않았는데 빼앗긴다는게 이상하지도 하지만, 나는 아직 이렇게 온몸으로 자신을 발산하는 여자에게 시선을 자유롭게 줄 만큼 익숙하진 않은가 봅니다.

별수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플레이 버튼을 누릅니다. 마침 이어폰에서는 들국화의 노래가 나옵니다. 사랑한후에.그의 메마르지만 서글픈 목소리를 들으며 버스는 종묘를 지나칩니다. 창밖에 보이는 공원에는 어디든지 노인들이 가득합니다. 버스가 잠시 신호를 받아 멈춰섭니다. 그리고 나의 시선은, 버스안의 여러쌍의 시선은 어디를 가야할지 몰라 방황하는듯한 노인들의 초라한 모습을 샅샅이 훑어내립니다.

공원의 시간은 그 자체로 주변과는 상관없이 흘러가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그 속에서는 다른 시계가 돌아가듯.. 꾀째째한 낡은 티셔츠를 입은 노인이 전철 출구 근처 좌판에서 소주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 옆 벤치에서는 장기판이 벌어졌습니다. 장기판 주변에는 제법 흥이 난 듯 노인들이 많이 몰려 있습니다. 그리고 길 옆에는 무언지 알 수 없는 약을 판매하는 노인이 있고, 그 주변에도 많은 노인들이 구경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옆자리의 그녀는 콤팩트를 보며 파우더를 바르고 있습니다. 파우더의 분냄새는 내 코를 간질이고, 소주를 걸치는 노인들의 행색은 내 눈앞에 어릿댑니다. 귓가에 전인권의 음성이 메아리칩니다.'나는 왜 여기 서있나....'

나는 어지럼증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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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cations : 올림픽공원
camera : Minolta Dynax 5 Digital
lens : 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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